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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예고편이 오히려 본 영화보다 더 나은 영화가 있다. 이런 경우 예고편이 본편보다 더 좋은 점은 예고편이 던져주는 떡밥에 가슴을 설레며 개봉을 기다리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구태여 허접한 영화 본편의 내용을 보면서 그간의 기대가 무너져 내리는 마음 상하는 경우를 겪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뭐, 굳이 이런 이런 영화가 그렇다고 예를 들 필요도 없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에이, 차라리 예고편이 더 나았어."라고 투덜거렸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두 번 쯤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이야기하려는 점퍼도 나누자면 이런 부류에 포함되는 영화다. 본 영화의 연출이나 특수효과의 화려함은 예고편에서 보여주었던 것보다 더 나은 무엇을 선사하지 못하고,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흡사 화장실에서 변을 보다가 누군가 문을 똑똑 노크하는 소리에 놀라서 어중간하게 끊고 나왔을 때의 그런 찝찝함을 선사한다.


점퍼는 단연코 평작 이하의 작품이다. 점프, 즉 순간이동이라는 능력의 컨셉을 의식한 듯 의도적으로 짧고 빠르게 밀어붙이는 전개는 경쾌하지 못하고 산만함만 더한다. 게다가 90분에도 채 이르지 못하는 짧은 러닝타임도 - 블록버스터 영화의 러닝타임이 점점 길어지는 요즘 추세와 비교해 보면 그 짧음이 더욱 부각된다 - 이야기가 아닌 볼거리에 주력하며 영화를 겉모습만 화려한 빈 깡통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관객들에게 세계관을 설명하기도 빠듯한 시간에 주인공이 점프 능력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놀고 어떻게 여자를 꼬시는지 보여주느라 정신 못 차리는가 싶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남은 시간 동안 이것저것 이야기를 벌려놓다가 제 풀에 포기하고 적당히 수습하고 급조한 결말로 대충 덮어버리고 만다. 이 정도면 디 워가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여튼 점퍼는 한 편의 완결된 영화라고 보기에는 차려진 음식의 양이 너무나 적다. 영화를 본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점퍼' 시리즈의 Pilot Episode, 딱 그 정도 수준이다.

그래도 나는 이 영화에 객관적인 평가치보다 별 반 개 정도를 더 얹어주고 싶은데, 그 이유는 점퍼의 세계관과 캐릭터가 주는 매력이다. 점퍼와 팔라딘의 대결로 귀결되는 점퍼의 세계는 무척 잘 짜여져 있다.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는 장소로만 점프를 할 수 있다는, 이런 능력에 으레 따를 법한 제약을 비롯해서, 점프를 하면 공간에 흔적이 남아 그것을 타고 다른 점퍼가 따라올 수 있을 뿐 아니라 추적 장치로 점프 장소를 찾아낼 수도 있고, 점퍼의 몸에 고압전류를 흘려보내면 장거리 점프를 할 수 없다는 등 점프 능력에 명확한 한계선을 그으면서도 평범한 순간이동 능력과 차별화하는 디테일한 설정이 무척 즐겁다. 게다가 성격이나 하는 짓이나 뻔하기 짝이 없지만 매력적인 외모 탓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 하지만 이런 장점들이 영화 자체의 힘에서 온다기보다는 영화가 의지하고 있는 원작 소설과 역할을 맡은 배우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 그만큼 영화가 구리다는 소리 되겠다.


영화의 결말은 아주 노골적으로 후속편을 암시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 나오면 후속편에는 별 관심이 안 가고 원작 소설을 찾아서 읽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마침 영화 개봉에 즈음해서 점퍼 1, 2권이 각권 6800원이라는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출간되었으니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법 하다. 원작 소설은 영화와는 달리 퍽 잘 쓴 소설이라는 평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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